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은평구 을 (문단 편집)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 ||<-4> {{{#ffffff {{{+1 '''은평구 을'''}}}}}}[br]{{{#ffffff 구산동, 대조동, 진관동, 갈현1동,[br]갈현2동, 불광1동, 불광2동, 역촌동}}} || ||<|2> '''기호''' || '''이름''' || '''득표수''' || '''순위''' || || '''정당''' || '''득표율''' || '''비고''' || ||<|2> {{{#ffffff {{{+5 '''1'''}}}}}} || [[송미화|{{{#373a3c,#dddddd 송미화}}}]](宋美花) || 5,397 || 3위 || || [include(틀: 통합민주당(2008년))] || 5.77% || 낙선 || ||<|2> {{{#ffffff {{{+5 '''2'''}}}}}} || [[이재오|{{{#373a3c,#dddddd 이재오}}}]](李在五) || 38,164 || 2위 || || [include(틀: 한나라당)] || 40.81% || 낙선 || ||<|2> {{{#ffffff {{{+5 '''3'''}}}}}} || 정두형(鄭斗亨) || 871 || 4위 || || [include(틀: 자유선진당)] || 0.93% || 낙선 || ||<|2> {{{#ffffff {{{+5 '''5'''}}}}}} || '''[[문국현|{{{#373a3c,#dddddd 문국현}}}]](文國現)''' || '''48,656''' || '''1위''' || || '''[include(틀: 창조한국당)]''' || '''52.02%''' || '''{{{#000000 당선}}}''' || ||<|2> {{{#ffffff {{{+5 ~~'''6'''~~}}}}}} || ~~장재완(張宰完)~~ || - || - || || ~~[include(틀:친박연대(2008년))]~~ || - || 사퇴 || ||<|2> {{{#ffffff {{{+5 '''7'''}}}}}} || 엄윤형(嚴允炯) || 428 || 5위 || || [include(틀: 평화통일가정당)] || 0.45% || 낙선 || ||<|3> '''계''' || '''선거인수''' || 186,121 ||<|3> '''투표율'''[br]52.5% || || '''투표 수''' || 95,617 || || '''무효표 수''' || 2,101 || '''친이vs친박 갈등의 정점, 나비효과 1'''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에 치러진 선거인데다 이재오가 MB의 최측근이다보니 그의 4연승이 무난할 것으로 보였는데.... 극심한 공천 갈등으로 인해 묘한 상황이 나타났다. 당시 한나라당이 과반은 확실하고 200석도 가능하다는 전망이 우세했던 탓에 전국 각지(특히 수도권, 영남)에서 공천을 놓고 갈등이 크게 일어났는데, 특히 직전 대선에서 친이와 친박이 치열하게 다툰 후유증이 수습되기는 커넝 총선을 앞두고 더 심해졌다.[* 당연한게 대통령 취임 2개월도 안 되어 치르는 선거라 여당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판이었다. 게다가 역대 최다 득표율 격차로 승리한 만큼 '한나라당 공천=당선'인 곳이 다수였으니 그 갈등이 오죽했을까?] 그런 와중에 [[이명박]] 대통령과 가까웠던 친이계가 대거 공천된 반면, 친박 중진들 다수가 컷오프당하자 갈등은 폭발했고[* 당시 [[박근혜]] 전 대표가 [[김무성]], [[홍사덕]], [[유기준]] 등 낙천 중진들에게 했던 말이 '살아서 돌아오라' 였는데 실제로 이들 다수가 [[무소속]](일명 '친박 무소속 연대') 또는 [[미래희망연대|친박연대]]의 이름으로 생환했다.] 격분한 친박 지지자들은 사상 유례없는 같은 당 후보 낙선운동에 돌입했다. 그리고 그 제1타겟이 친이 핵심이었던 이재오였던 건 안 봐도 비디오.... 그렇게 해서 친박 유권자들이 전략적으로 대선에 출마까지 했던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를 밀었고, 이에 호응하듯 선거 전날 친박연대 후보가 사퇴를 하면서 결과는 10% 넘는 차이로(통합민주당 후보가 5%를 잠식했음에도) 문국현의 승리. 이재오의 이 패배가 더 뼈아팠던 것은 당시 한나라당이 서울 48석 중에 40석을 차지하는 초압승을 거뒀음에도 정권의 핵심부 인물이 지금까지 자신이 나간 선거 중에서 가장 큰 격차로 패했다는 것. 물론 2년 뒤 재보선에서는 낙승하고 복귀하는 데 성공했지만...[* 참고로 이때 친박 진영에서 대대적인 낙선운동의 대상으로 꼽았던 인물들이 이재오, [[이방호]](경남 사천), [[정종복]](경북 경주), [[전여옥]](서울 영등포 갑)이었는데 전여옥을 제외하고는(사실 여기도 낙승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1~2%차 이내 초접전으로 신승했다) 모두 낙선의 쓴맛을 봤고, 이방호를 이기고 당선된 인물이 바로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